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쓰 사건 (문단 편집) == 사죄 == 외교적인 결례와 문제를 범한 일본은 '''국가적인 위기'''를 맞았다. 황태자가 다치는 선에서 끝났다고 해도 당시 국제 정세에서 [[암살|이러한 사건]]은 나중에 터지는 [[사라예보 사건]]의 예처럼 '''[[선전포고]]의 명분'''이 될 수 있었다. 미친 경찰관 한 명 때문에 [[러일전쟁]]이 훨씬 일찍 터질지도 모르게 될 판이었다. 아직 근대화가 덜 된 1890년대의 일본은 러시아와 상대가 되지 않는 국력 차이가 있어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 수준인 데다[* 일본이 근대화를 좀 더 진행한 13년 뒤에 일어난 [[러일전쟁]]에서도 일본은 전장이 일본의 앞마당인 데다 러시아를 견제하던 영국과 미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고 러시아 국내적으로도 [[피의 일요일 사건]]이 터지는 등 여러 호재가 맞물려 간신히 승리했다.] 갑작스럽게 터진 일이라 당시 일본은 러시아와 싸울 준비가 전혀 되지도 않았다.[* [[러일전쟁]]이나 [[태평양 전쟁]]은 일본이 오랜 준비를 마치고 [[선전포고]] 없는 기습공격으로 시작해 벌어졌다. 객관적으로 일본의 전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렇게 해서 그나마 격차를 메꾸려고 했다.] [[일본 제국|일본]]에선 분노한 러시아가 자신들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전국적으로 공러증에 빠졌다. [[일본인]]들은 민·관을 가리지 않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필사적으로 러시아에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면서 사죄했다. 외무대신이었던 [[아오키 슈조]]와 내무대신이었던 [[사이고 주도]]가 사임했고 [[학교]]는 휴교하고 [[신사(신토)|신사]], [[절(불교)|절]], [[교회]]에서는 황태자의 회복을 비는 [[기도(종교)|기도]]를 했다. 황태자 앞으로 보내진 문안 전보는 1만통을 넘었고 [[야마가타현]] 모가미군 가네야마촌(山形県 最上郡 金山村, 현재의 가네야마정)에서는 '쓰다'와 '산조'라는 이름을 금지하기로 결의했다. [[파일:220px-Hatakeyama_Yūko.jpg]] [[5월 20일]]에는 하타케야마 유코(畠山勇子, 1865~1891)라는 26세 여성이 교토에 가서 '''[[자살|목숨을 끊어]]''' 니콜라이 황태자에게 사죄를 하는 일까지 벌어졌는데 당시 일본 언론에서는 이 여성을 [[열녀]]라며 매우 찬양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